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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IVE/book

모래로 지은 집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공무가 웃을만한 일이라면 아무리 작은 것이더라도 메모해놓았다가 편지에 썼다. 너 그거 정말이야? 웃겼어, 라는 답장이 오면 그보다 큰 보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편지들이 그 시절의 나를 구해줬던 것 같다.

어쩌면 그때 그녀는 자기에게 그 모든 개 다 사랑이라는 말을 하고싶었는지도 몰라. 그 말이 거짓이고 얕은 자기 위안에 불과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제대로 된 위로조차 할 수 없었던 외로운 사람에게 어떤 비난을 할 수 있을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공무화 모래와 함께 롯데리아에서 팥빙수를 먹던 때가 그리웠다. 거친 얼음과 다디단 팥의 맛, 작고 단단한 찹쌀떡의 맛, 마지막에 바닥에 남은 것을 마실 때의 시원함 같은 것들이.

아마 그즈음부터 모래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매일 조금씩 달라졌듯이, 모래 또한 내가 처음 만났던 모래와는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 신경쓸 시간에 너 밥이나 잘 먹고 다녀."

"친구야."

"응."

"사랑해."

"뭐라는 거야."


그날 밤에 잠들지 못하고 뜬눈으로 누워서 생각했지. 네가 밉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날 밤, 나는 내가 평생을 속으로 다른 사람들을 책망하며 살았다는 걸 알아차렸어. 그리고 그 책망의 무게만큼 그 사람들에게 의존했다는 것도.

언젠가 네가 한 말을 난 종종 떠올렸어.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전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꼬,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나는 무정하고 차갑고 방어정인 방법으로 모래를 사랑했고, 운이 좋게도 내 모습 그대로 사랑받았다. 사랑만큼 불공편한 감정은 없는 것 같다고 나는 종종 생각한다. 아무리 둘이 서로를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더 사랑하는 사람과 덜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한다고. 누군가가 비참해서도, 누군가가 비열해서도 아니라 사랑의 모양이 그래서.